Tuesday 21 March 2017

민족대표 33인의 후손들...이 친일파 자손이라 떵떵거리고 산다고?(2)

앞서 루머의 논리적 문제에 대해 설명했으니, 이번엔 팩트를 체크해 보자. 팩트 체크를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들이 실제 팩트를 체크해서 보여주면 믿지 않고 자신의 선입견만 계속 주장하는 모습이 아이러니이긴 하지만, 그 아이러니를 타파하기 위해서라도 계속 팩트를 체크해 나갈 필요가 있다.

1편 : http://anehistory.blogspot.ca/2017/03/33-1_21.html

1992년에 시사저널이라는 잡지에서 3.1절을 기념하여 그 후손들의 현 상황을 취재한 기사가 나온 적이 있다. 혹시 진영논리를 오용하여 공격하려는 분들을 위해 미리 말해두자면, 이 시사저널은 현재의 시사저널에서 시사인이 분리되기 훨씬 이전의 시사저널로서, 진보진영을 대표하는 잡지 중에 하나였다. 2007년 시사저널 삼성 기사 삭제 사건 이후 주요 인력들이 빠져나와 시사인을 창간하여 그 이후 시사저널은 보수적인 색채를 띠게 되었지만, 1990년대 시사저널은 진보의 끝자락에 위치한 잡지이다.

33인이 남긴 긍지와 치욕 - 시사저널 1992.03.05

제목부터 봐도 민족대표 33인을 옹호하려는 취지가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상세한 내용은 사실 기사 원문을 보면 될 테고, 일단 아래에는 민족대표 33인의 후손들이 얼마나 어렵게 살고 있는지, 그들의 조상이 독립운동가였음이 어떻게 확실해 지는지 정리해서 점검해 보겠다. (참고로 이 글이 모두 옳지는 않다. 특히 33인의 행적에 대해서는 대략 조사한 부분도 있는 것 같다. 그 부분은 이 블로그의 이전 포스트와 비교하며 읽기 바란다. 예를 들어 손병희 선생의 대략적인 행적은 맞지만, 1940년이라는 꽤 늦은 시기에 사망한 것으로 잘못 기록하고 있다. 손병희 선생은 고문으로 대단히 몸이 약해져서, 일제의 정책에 의해 - 죽을 놈 내보내서 죽게 하여 비난을 희석하려는 수작 - 병보석으로 석방되어 곧 사망하였다.)

일단 이들이 부자가 아닌 것을 가장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그들이 어디에 살고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를 확인해 보면 된다. 기사가 친절하게 작성되어 있지는 않지만 유독 셋방살이라는 표현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여기에서 출발해 보자. 물론 이것은 1992년의 기사이므로 현재는 달라졌을 수 있지만, 어차피 "민족대표 33인이 친일파라서 물려받은 재산으로 호의호식한다"라는 루머를 반박하는 게 목적이기 때문에 1992년 기사로도 충분할 듯하다.

1. 후손들의 1992년 당시 상황
다음은 위 기사를 간단히 요약한 내용이다.

셋방살이
이승훈 선생 후손 : 증손부 및 고손 두 형제가 셋방에 삼.
권동진 선생 후손 : 권혁방 씨(33인 유족회 회장), 권동진의 증손이며 보훈혜택도 못 받는 가운데 안양시 셋방에 삼.
박동완 목사 후손 : 손자 박재상 씨와 노모 최선옥 씨는 마포구에서 월세 살이. 노모가 허리를 다쳐도 보훈 혜택을 못 받는다고.

셋방이라는 말은 없으나 힘들게 사는 것이 확실한 후손들
김완규 선생 후손 : 손자 김몽한 씨, 셋방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매월 나오는 얼마간의 연금에 의지해 힘겹게 살고 있다고.
박준승 선생 후손 : 손자 박기수 씨. 밭농사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고.
신홍식 목사 후손 : 손자 신덕수 씨. 4살 때 부친을 여의고 고아원에서 자랐으며, 교육을 받지 못해 막일을 하며 살아왔다고.
양전백 목사 후손 : 손자 양승유 씨. 도봉구에서 연금만 바라보며 살고 있다고.
이명룡 장로 후손 : 손자 이태영 씨. 특별한 언급은 없지만 주소인 중랑구 면목동은 그 때나 지금이나 서울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 중 하나다.
이종훈 선생 후손 : 손자 이성문 씨가 북가좌동에서 어렵게 산다고.
홍기조 선생 후손 : 손자 홍재웅 씨가 닭튀김 장사로 노모를 부양하며 인천의 한 아파트에 살고 있다고.

기타
신석구 목사 후손 : 손자 신성균 씨. 북한에서 얻은 교사자격증으로 교직에 종사하다가 자격을 박탈당해 법무사 일을 보고 있다고.
양한묵 선생 후손 : 고손자 양상승 씨. 잠실주공아파트에 살며 교육청 근무 중.
오세창 선생 후손 : 손자 오천득 씨. 논노패션에 근무.
오화영 목사 후손 : 양손자 오영 씨. 방배동에 살며 직업은 의사라고.
유여대 목사 후손 : 손자 유효창 씨. 충남 조치원에 살며 교직에 종사하다가 당시 보험회사에 나가고 있다고.
이종일 선생 후손 : 손녀 이장옥씨가 김포군 월곶면에 살고 있다고.
이필주 목사 후손 : 손자 이현기씨가 호주로 이민가서 살고 있다고.
임예환 선생 후손 : 증손자 임종선 씨가 영등포구 신길동에 살고 있다고.
변절자 정춘수 후손 : 강원도 양구에 살고 있으며, 해마다 3.1절이 오면 부끄러워 산 속으로 숨는다고 인터뷰했다.
최성모 목사 후손 : 독자 최경환 씨는 조선일보 기자를 거쳐 한독당에 있었고 60년 작고. 그 후손 3형제 중 막내 명기 씨만 당시까지 살아 있었다고.
김창준 목사 후손 : 월북하여 활동했기 때문에 후손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나인협 선생 후손 : 일산(당시는 신도시 개발 이전)에 살고 있다는 기록만 남아 있다.
김병조 목사 후손 : 아들 김행식 씨. 화성에서 목사로 목회 중.
변절자 박희도 후손 : 아들 박순도 씨는 치욕을 못이겨 미국으로 이민 갔다고.

사회 지도층
이갑성 선생 후손 : 이갑성 선생이 정치계로 진출한 덕에 자손도 사회 지도층에 이름을 올린듯 하다. 둘째 아들 이용희는 통일원 장관을 지냈다고.
변절자 최린 후손 : 차남이 판사를 지낸 법조인이라고 한다.
길선주 목사 후손 : 증손자 길원철 씨. 강원산업 이사로 재직 중이라고.

2. 간략한 분석

 일단 상당수의 민족대표들의 후손이 어렵게 살고 있다는 언급이 눈에 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보훈 혜택을 못 받는 경우도 많았던 것 같다.

 동아일보 사장과 오산학교 교장을 역임한 남강 이승훈 선생의 후손은 용산구에서 셋방살이를 했다. 사장과 교장의 자손이 셋방살이라니 믿어지는가?

 후손들이 친일파의 자손이라 떵떵거리고 살면서 진보 진영에 속한 설민석 강사를 공격하고 있다는 루머는 그야 말로 악성 루머임이 팩트를 통해 다시 확인되는 셈이다.

 어렵다는 언급이 직접적으로 적혀 있지 않은 경우에도, 세상에서 떵떵거리면서 살고 있을 만한 이들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장관이 1명, 기업 이사가 1명, 법조인이 1명 있고, 기자를 사회 지도층으로 굳이 본다면 기자 출신의 정당인이 1명 있다. 그나마 이 중에 한 명은 33인 중 3명의 친일파 중 한 명의 후손이다. 대부분 작은 아파트에 살면서 교직이나 보험회사, 교육청, 밭농사 등 평범한 (그리고 돈 안 되는) 직업에 종사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이 오래된 기사를 다시 분석해서 올린 이유는 단 한 가지다. 자신의 선입견에 근거하여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제발 줄어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특히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면 더욱 그런 자세를 버리고 팩트를 체크하는 자세를 가졌으면 좋겠다.

며칠 내로, 가장 핫이슈 중 하나인 민족대표 33인의 3.1절 당일 행적에 대한 포스트를 올려 보도록 하겠다.

민족대표 33인의 후손들...이 친일파 자손이라 떵떵거리고 산다고?(1)

이번 설민석 강사와 민족대표 33인 관련 논란에서 가장 어이없고 근거없는 악성 루머 중의 하나가 이 루머다.

"민족대표 33인 대다수가 변절해서 친일파였고, 그래서 그 후손들이 친일파의 후손으로 재산도 많이 물려 받고 해서 떵떵거리고 살고 있다. 그래서 33인 유족회라는 단체가 진보 진영의 설민석 강사를 공격하는 것이다."

그야 말로 아무런 근거도 맥락도 없이 등장한 말이다. 민족대표 33인의 후손이 어떤 삶을 사는지 제대로 조사해 본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이 나오게 된 원인을 짐작해 볼 단서는 있다.

1. 루머의 출발 지점 : "33인 유족회"의 존재
 설민석 강사가 민족대표 33인을 폄훼하는 강의를 했다는 것에 대해 "33인 유족회"가 항의를 했다는 팩트에서 논리가 출발한다. "33인 유족회"가 존재하는 것도, 민족대표 33인의 직계 장손으로만 이루어져 있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이 분명한 팩트가 대중들의 성향과 무지와 맞물려져서 이상한 루머로 발전하게 된다.

2. 루머의 시작 : "33인 유족회"는 보수다.
 루머의 논리는 무한도전 등에서 활동하고 대중 중심의 사관을 가지고 있어 진보 진영에 속한다고 여겨지는 설민석 강사가 "33인 유족회"에 의해 '공격'당했다는 관점에서부터 시작한다. 여기에는 진영논리가 가미되어 있다. 무한도전=설민석=대중 사관=진보 진영 VS 그 설민석을 공격한 "33인 유족회"=보수 진영=친일파라는 기발하고 독특한 진영논리가 여기 들어있는 것이다. 필자 또한 무한도전의 광팬이며, 태어나기를 보수로 태어났다가 자라면서 점점 진보 쪽으로 방향을 틀어 현재는 중도 진보 진영에 속하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이 진영논리는 좀 과하지 않은가?

3. 루머의 완성 : "33인 유족회"는 친일파다.
 앞의 논리는 "33인 유족회"에 대한 정보 부족으로 다음과 같이 심화된다. 민족대표 33인의 후손들이 "33인 유족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활동한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그들은 재산이 많거나 사회적 지위가 있는 유력자들임에 틀림없고, 그들이 그럴 수 있는 것은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운동가로 산 것이 아니라 친일파로 변절했다는 정황 증거라는 것이다. 즉,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대체로 독립운동 때문에 가세가 기울어 힘들게 살고 있고, 반대로 친일파들은 그 때 모은 재산과 지위로 지금도 떵떵거리며 살고 있다는 최근 특히 부각되고 있는 아픈 진실을 여기에다가 잘못 적용한 셈이다.

4. 루머의 문제점 : 논리적으로도 문제, 팩트도 문제.
 그런데 이 논리들은 거의 대부분이 잘못된 정보에 기초하고 있고, 내적으로도 충분한 논리가 아니다. 팩트에 대해서는 아래 자세히 살펴볼 예정이므로 일단 여기에서는 논리의 내적 문제를 먼저 짚어 보자.

 1) 진영논리의 남용 : 앞서 잠깐 이야기했지만, 진영논리는 너무 과하게 남용되면 안 된다.필자가 아직 진보에 완전히 발을 들여 놓지 않고 중도에 발을 걸치고 있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사회가 갈 수록 극단적 주장만이 힘을 얻는 사회로 바뀌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쉬움이 있다. 내 편이 아니면 모두 적이고, 그냥 적인 정도가 아니라 때려 죽일 대상이라고 인식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은가? 설민석 강사가 진보 진영에 속한 인물인지는 둘째 치고, 진보 진영에 속한 인물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다 보수라고 할 수 있는가? (심지어 그들 인식 속에서는 보수일 뿐만 아니라 친일파라고 여기고 있으니 더욱 문제다.)
 "33인 유족회"가 보수라는 또 다른 정황 근거로 그들이 드는 것 중에 하나는 "33인 유족회"가 국정교과서에 대해 반대 성명을 내는 것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 중요한 국가적 역사 이슈에 침묵하다가 조상들을 건드리니 (그것도 치부를 건드리니) 발끈하는 것 아니냐는 식의 인신공격이다. 팩트 체크는 잠시 후에 하기로 했으니 넘어가고, 이 논리는 과연 정상적인 논리일까? 이 주장을 하는 이들은 우리나라에 있는 수많은 단체들 중에서 어떤 단체들이 국정교과서를 반대했고 어떤 단체들이 찬성했으며 어떤 단체들이 침묵했는지 정확히 알고 있을까? "33인 유족회"라는 이번에 처음 들어보게 된 단체가 1년 전, 혹은 6개월 전 국정교과서 반대 성명을 냈는지 안 냈는지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그런데 내 기억에 없으니 안 낸 것이고, 안 냈으니 찬성한 것이고, 찬성했으니 보수 친일파라는 이 논리는 내적인 문제가 있는 것이다.
 팩트 자체를 체크해 보면, "33인 유족회"는 광복회 산하 단체다. 민족대표들의 장손만 가입되어 있으므로 인원 자체가 얼마 안 되는 작은 단체다. 광복회에서 국정 교과서 반대 성명을 내면서 여러 독립운동가들의 후손들과 일반 시민들의 서명을 모아 정부에 전달한 바 있는데, "33인 유족회"의 대부분은 여기에 같이 서명했을 것으로 보인다.

 2) 단체의 운영은 돈이 들 것이니 후손들이 부자일 것이라는 논리 : 위에 잠깐 언급했지만 "33인 유족회"는 작은 단체다. 1947년 발족하였고 청계천 주변의 작은 사무실을 전전하며 활동해 왔으며, 정부의 지원은 전혀 없었기에 활동이 미약한 편이었다. 만약 단체를 운영하는 이들이 모두 부자라면 세월호 유족들도 부자인가? 단체의 운영이 돈이 들 것이니 후손들이 부자이고, 그 말은 곧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한 게 아니라 친일하여 재산을 모은 것이라는 이 논리는 논리 자체에 이미 오류가 있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정상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33인 유족회"와 친일파의 후손이라고 주장할 논리가 절대적으로 부족함을 확인할 수 있다. 결국 이 루머는 감히 설민석을 공격했다는 진영 논리 + 민족대표 33인이 한 게 없고 대부분 변절했다는 자신들의 선입견에 의해 만들어진 자폭 논리라고 할 수 있다.



2편 팩트 체크로 이어집니다.

Monday 20 March 2017

민족대표 33인과 친일파(3)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민족대표 33인과 관련된 팩트 점검 3탄이다.


왜 이런 글을 쓰고 있는가 : http://anehistory.blogspot.ca/2017/03/33.html
1탄 : http://anehistory.blogspot.ca/2017/03/33-1.html
2탄 : http://anehistory.blogspot.ca/2017/03/33-2.html

1탄에서는 행적이 확실하고 쉽게 자료가 입수되는 독립운동을 계속한 12인을 소개했다.
2탄에서는 행적이 확실하고 독립운동도 계속하였으나 자료를 찾기가 어려운 11인을 소개했다. 민족대표 33인 중 이상 23인은 그 누구도 비판하기 어려운(그 중 몇 사람의 독립운동을 소극적인 운동이었다고 비판할 여지가 있지만 그렇다 해도 그것은 비판을 위한 비판에 지나지 않는다.) 인물들이다.

이번 편에서는 상대적으로 논란의 대상이 될 만한 7인과 확실하게 친일을 한 3인을 다루려고 한다.

1. 종교 활동에 전념한 이들 (6인)

이 분들도 크게 셋으로 나뉜다. 종교 활동에 전념하였으나 여러 형태로 독립운동에 관여한 것으로 보이는 3인과, 전적으로 종교 활동에만 전념한 3인이다. 전자는 김완규 선생, 임예환 선생, 홍기조 선생 세 분이고, 후자는 길선주 목사, 나용환 선생, 나인협 선생이다.

김완규 선생 : 천도교 대표. 손병희의 측근. 손병희에 의해 민족독립운동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된다. 3.1운동에 참여하였고, 심문을 당할 때 망설임없이 "다시 기회가 온다면 언제든지 조선의 독립운동을 위해 나설 것"이라고 독립의지를 피력하였다.2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3.1운동 이전 1910년부터 천도교월보의 발행인으로 있었는데, 천도교월보는 한일병합을 비판하는 등 항일언론이었고, 일제의 탄압으로 1937년 6월에 폐간된다. 참고논문에서 폐간 당시 김완규 선생의 직함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 확인이 되지 않으나, 지속적으로 천도교월보의 리더로 참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자료- "천도교의 민족대표 김완규와 그의 독립정신", 동학학보 제11권 2호

임예환 선생 : 천도교 대표. 동학농민운동과 3.1운동에 참여하였다. 출옥 후 활동에 대한 상세한 기술은 찾을 수 없지만 다수의 자료들이 출옥 후에도 계속 독립운동을 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좀 더 자세히 조사할 필요가 있는 분.

홍기조 선생 : 천도교 대표. 3.1운동 이후 천도교 도사, 장로로 지내면서 청소년에게 민족정신을 고취한 것으로 나온다. 정확히 무엇을 한 것인지 확실하지 않으며, 이를 독립운동으로 볼 수 있을지는 더 확인이 필요하다.

길선주 목사 : 기독교 대표. 3.1운동 당시 태화관 모임에 늦어 따로 자수하여 일제의 심문을 받았다. 민족대표 33인 중 유일하게 무죄 선고를 받아 대한민국 독립과 관련된 훈장을 받지 못하다가, 미결수로 1년 7개월 간 옥고를 치른 사실이 알려지면서 2009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이후 종교 활동에 전념하게 되는데, 일제 치하의 우리나라를 로마 제국 치하의 이스라엘과 동일시하면서 계시록을 바탕으로 한 부흥사경회에 집중했다. 일제를 이스라엘의 적이었던 로마와 동일시했으므로 기본적으로 적으로 간주하고 있었던 듯하나, 현실을 뒤집어 엎을 수 없다고 보고 이승 이후의 삶 쪽에 주력한 듯. 1935년에 사망.

나용환 선생 : 3.1운동 이후 행적이 상세히 기록된 자료를 찾을 수 없다. 대체로 천도교 포교에 전념한 것으로 본다. 1936년에 사망하였다.

나인협 선생 : 동학농민운동과 3.1운동에 참여한 외에는 주로 천도교 종교활동에 집중하였다. 1951년 사망.


2. 논란의 대상인 인물

이갑성 선생 : 기독교 대표. 일단 약력을 훑어보면 논란 자체가 되지 않을 완연한 독립 투사다. 3.1운동 당시 23세의 젊은 나이로(김창준, 박희도와 함께 최연소)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여 옥고를 치렀다. 1927년 신간회 결성 시 창립 멤버로 참여, 1931년 신간회 사건으로 조선총독부서 체포령이 떨어져서 1933년 상하이로 망명, 임시정부에서 독립 운동을 펼치다가 1938년 귀국한다. 귀국과 동시에 흥업구락부에서 활동하다가 1940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7개월간 복역했다. 해방 후에는 주로 우익 계열에서 활동했다. 1965년 광복회 회장을 지냈다.

이갑성 선생의 친일 의혹은 몇몇 독립운동가들이 그가 임정에 참여할 당시 일제의 이중간첩이었다고 증언하면서 시작되었고, 창씨개명을 한 것으로 인해 강화되었다. 민족대표 33인 중 창씨개명을 한 사람은 변절자 최린, 변절자 정춘수, 그리고 이갑성 세 사람이다. 친일파 연구의 선구자인 임종국 선생과 그에 의해 탄생한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특히 그의 40-45년 사이의 행적을 조사하여 그의 친일의혹을 집중 부각시켰다. 그러나 2005년 3.1절 특집 SBS 뉴스 추적 "누가 변절자인가" 편에서 면밀한 검증이 이루어졌고, 이후 현재 학계에서 이갑성의 친일 의혹은 사라진 상태다. 이후 민족문제연구소에서도 친일인명사전에서 그의 이름을 빼는 것으로 학계의 의견에 동의했다.

인터넷을 찾아보면 2005년 이전 자료에서는 이갑성 선생의 친일 의혹 제기가 종종 등장하지만, SBS 특집이 방영되고 그에 대한 학계의 연구가 진행된 2007년 이후 자료에서는 이갑성 선생의 친일 의혹이 사실상 사라진 상태다. 따라서 이 분의 정확한 타이틀은 "논란이 있'었'던 인사"가 되어야 하며, 활동 약력을 통해 볼 때에는 행적이 확실한 독립운동가 반열에 들어가야 할 것으로 본다.


3. 변절자 3인

어떤 자료들은 변절자 3인 중 정춘수가 105일 간의 고문을 당한 끝에 전향하여 상대적으로소극적인 친일을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그렇게 급을 나누어 볼까 했는데, 직접 정춘수의 활약상을 목도하고 나니, 도저히 그렇게는 쓰지 못할 것 같아 세 사람을 함께 다루도록 하겠다.

정춘수 목사 : 1938년까지는 나름 독립투사였다. 목회 활동을 하면서 신간회에 참가하기도 했고 흥업구락부에도 참가했다. 그러나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105일 동안 고문을 당한 뒤 전향서를 발표하고 친일로 돌아섰다. 친일 내역은 상당히 화려한데, 일제의 비호를 받아 조선 감리교의 수장이 되고, 일제의 시책 대로 조선 감리교회와 일본 감리교회의 통합에 앞장 섰으며, 신사참배에 앞장서고, 태평양전쟁과 중일전쟁에도 적극 협조하여 교회와 철문 등을 헌납하고 심지어 감리교 소속 교회를 몇 개 팔아 비행기 3대를 헌납하기도 했다. 아마 정춘수의 친일이 소극적이었다고 평가한 일부 자료들은 그가 주로 친일 활동을 한 단체의 직함들을 가지고 있었을 뿐, 개인적으로 나서서 강연을 한다든지 그런 종류의 친일 활동을 안 했기 때문에 다른 두 사람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극적이었다고 평가한 모양인데, 수장이라는 직함을 단 단체에서 저런 짓을 했다는 것은 빼도 박도 못하는 정춘수의 책임이다.

최린 : 3.1운동과 이후 일제의 심문을 받던 당시 그의 행보를 "당당하다"고 표현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적극적이었으나, 이후 변절하여 거의 "천도교 전체"를 일제에 들어다 바치는 행위를 했다. 신간회 활동을 하면서도 "민족개량주의"를 주창하며 총독부와 밀착된 행보를 이어갔고, 34년에는 중추원 참의에 임명되는 등 본격적인 친일을 한다. 강연, 학병 권유, 내선일체 지지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적극적인 친일 행적을 남겼다. 다만 해방 후 반민특위에 참석해서는 나름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모습을 보여 다른 이들과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것으로 죄를 덮을 수 없으니 탈이지만.

박희도 목사 : 기독교계에서 최린과 유사한 행보를 보이며 아주 적극적으로 친일을 했다. 민족개량주의를 주창한 것, 34년부터 본격적으로 친일 행위를 한 것 등이 최린과 유사하다. 최린과 함께 강연을 다녔고, 동양지광이라는 잡지를 창간해서는 각종 논설을 실었는데, 내용은 말할 것도 없는 그렇고 그런 내용들. 학병 권유 강연도 무지하게 다녔다고 한다.


이상으로 민족대표 33인의 일대기를 대략 훑어 보았다. 공개된 자료인 위키백과, 나무위키등의 문서를 많이 참조하고, 이문영 작가의 물밑한국사의 도움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학문적인 연구라고 보기는 어렵다. (물론 일부 인사들에 대해서는 위키에 상세히 나와 있지 않아 논문을 비롯한 다양한 자료들을 참고했다.) 그러나 위키백과의 장점 중 하나는 학계의 다수설과 대중의 인식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번 설민석 강사의 옛 강의로부터 촉발된 논쟁에서, 많은 이들이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위키백과조차도 훑어보지 않고 민족대표 33인에 대해 함부로 말한 점은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필자의 조사에 따르면 최소한 23명(실질적으로 친일 의혹이 사실상 풀린 이갑성 포함 24명)은 일생토록 적극적인 항일 독립 운동을 한 분들이고, 3명은 종교 활동에 주력했으나 민족 정기를 함양하고 이런저런 모양으로 항일 활동을 이어갔으며, 3명은 친일도 반일도 하지 않고 종교 활동에만 전념했고, 3인은 변절자가 되었다.

물론 3인의 변절자도 나오지 않고 모든 이들이 적극적인 독립투사가 되었다면 더 좋았겠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이 분들의 일대기를 보면서 어찌 이 분들을 함부로 욕할 생각을 하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면이 더 많다. 3.1운동에 대중의 영향이 더 컸느냐, 지도자들의 영향이 더 컸느냐 하는 것은 사관이 다른 이들이 충분히 논할 수 있는 역사 논쟁이다. 그러나 내 생각과 다르다고 자신의 시대적 한계 속에서 성실히 독립운동하며 살아간 분들을 폄하하고 욕하는 것은 좀 아닌 것 같다.

다음 편에는 미리 예고한 대로, 3.1운동 당시의 민족대표 33인의 행적에 대하여 좀 이야기해보겠다. 또한 후손들에 대한 인신공격도 댓글에서 이어지고 있는데 이 부분도 좀 조사하여 글로 남겨 보겠다.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또 찾아주시길 바란다.

Saturday 18 March 2017

민족대표 33인과 친일파(2)

최종업데이트 : 2017.3.24
 

2탄이다. 원래는 논란의 대상이 될만한 사람이 많을 줄로 알고, 이번 편에 논란의 대상들을 다루겠다고 했다. 조사하면서 느낀 바는 애초에 논란의 대상이 될만한 인물 자체가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정말 사람들이 진실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생각만 옳다고 여기고 싶은가 보다.

이번 편에는 11분의 민족대표의 3.1운동 이후 행적을 적어보았다. 조사하는데에만 3시간이 걸렸다. 대부분의 자료가 3.1운동 당시 행적 중심이라 일일히 검색하고 찾아보아야 했다. 자, 지난 편(행적이 확실하고 자료가 쉽게 입수되는 12분의 민족대표)에 이어 이번 편에는 행적은 확실한데 자료가 쉽게 입수되지 않거나 논란을 일으키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억지 논란을 일으키는 인물 11분의 민족대표를 다루어 보겠다. 이 말의 의미가 아직 다루지 않은 10명은 논란의 대상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 분들은 다음 편에서 한꺼번에 다루겠다.


왜 이런 글을 쓰고 있는가 : http://anehistory.blogspot.ca/2017/03/33.html
1탄 : http://anehistory.blogspot.ca/2017/03/33-1.html

이 글들을 먼저 읽고 보시면 더 좋겠다.


손병희 선생 : 천도교 대표. 손병희 선생은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에도 대표로 이름이 나올 정도로 민족대표 중에서도 대표로 인정받는다. 이 분을 행적이 확실하고 자료가 쉽게 입수되는 첫 번째 14인 명단에서 뺀 것은 이 분에 대해 논란을 일으키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서이다.

이번에 설민석 강사의 강의에서도 민족대표들이 태화관에서 모인 이유가 거기 마담(?)이 손병희 선생과 그렇고 그런 사이여서였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문제는 얼마나 사실이냐는 건데, 손병희 선생이 기생 출신의 세 번째 부인과 결혼한 것은 맞다. 다만 학계에서는 손병희에 대한 악의적 루머들은 조선총독부에서 퍼뜨린 소문이 꽤 많다고 보고 있다. 3.1운동 당시 일제 당국의 발표 등을 분석한 연구가 있는데, 그 때 자주 다루었던 기사가 “요승 손병희의 엽색 행각”이었다고 한다. 교수 신복룡이 일제의 이런 자료들을 분석하여 “3.1운동은 기생집에서?”라는 기사를 어느 신문에 냈는데, 아마 이것이 현대에 손병희 선생을 폄하하는 평가의 출발점이 된 듯하다. 심지어 신문 삽화는 기생들이 민족대표에게 서빙하는 장면으로 그렸다고 한다. 이에 대해 천도교와 독립운동가 유가족들이 반박하여 신복룡 교수가 사과했다고 한다.

손병희 선생은 일제의 고문을 받다가 병보석으로 출옥한 후 1922년에 별세하였는데, 당시 일제는 가만두면 죽을 것으로 보이는, 상태가 매우 악화된 수인들을 일부러 병보석으로 석방하여 감옥 밖에서 죽음을 맞게 하는 경우가 꽤 있었다. 감옥에서 죽으면 여론이 더 악화될 것을 우려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손병희 선생이 이 케이스였던 것 같다. 이 분의 일생에 대해 여러 말이 나올 수 있겠으나, 민족의 독립을 염원하다가 일제에 의해 목숨을 잃은 분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을 듯싶다.

김창준 목사 : 기독교 대표. 3.1운동으로 2년 6개월을 복역한 김창준 목사는 출옥 후 1923년 미국 유학을 떠났다가 1927년 귀국, 기독교 사회운동을 강조하던 진보적 기독교계 인사들과 교류하며 기독교 사회주의 성향의 ‘기독신우회’를 창립하였고, 일제의 대륙 침략이 강화되던 1935년에는 한인근거지를 구축하기 위해 만주로 가서 해방될 때까지 그곳에서 경제 운동을 벌였다. 그는 회고록에서 독립선언 직후 끌려간 일제 총독부 취조실에서 하루 세 차례씩 고문을 당하고 매일 물도 없이 주먹밥 하나로 배고픔을 견뎌야 했으며, 11일 만에 18kg의 체중이 줄어든 상황을 증언하고 있는데, 당시 민족대표들이 감옥에 들어가 겪은 고초가 얼마나 컸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김창준 목사의 항일운동은 매우 철저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문영 작가의 물밑한국사나 위키백과에조차도 그에 대한 정보가 잘못되어 있는 점이 많다는 것은 아쉬운 점이다.
http://premium.mk.co.kr/view.php?cc=100000&field&keyword&page=3&no=15381
http://www.ssu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3935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465395.html#csidx521685f3372fa89a274820b091bc2b6

홍병기 선생 : 천도교의 홍병기는 출옥 후에 만주로 가 고려혁명당 고문으로 독립운동을 이어가다가 신의주에서 체포되어 또 옥고를 치렀는데 그 손자는 닭튀김 장사를 하다가 실패하고 아내가 동사무소 공공근로를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권병덕 선생 : 독립 선언 직후 일제 경찰에 연행돼 2년 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7년 천도교인들과 함께 신간회 활동에 참여했다. 1930년대 중후반 일제가 민족말살 정책을 강화하자 독립투사들의 활동을 수록한 역사책을 저술해 펴내려다 일제의 탄압으로 좌절되기도 했다. 1943년 향년 76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02/28/0200000000AKR20170228024300014.HTML

권동진 선생 : 천도교 대표. 3.1운동 이전에는 을사늑약 반대운동, 남궁억의 대한협회 등 참여. 3.1운동 당시 일본 판사의 신문에 권동진은 "독립이 될 때까지는 어떻게든지 할 것"이라고 말했고, 그 말을 지켰다. 3.1운동에 참여하여 3년간 복역한 뒤, 1926년 국민당을 조직, 당수가 되어 민족독립운동의 진행을 계획하였지만 밀정에 의해 사전 검거된다. 1927년 신간회 부회장이 되었고,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전국적인 시위 확대를 계획하여 다시 연행된다. 신간회에서 민중대회를 개최하려다가 잡혀가서 1년간 복역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이 분을 요시찰인물로 지정, "조선독립을 몽상하여 그를 위해 운동할 우려가 있음"이라고 평함.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1930년대 이후로는 주로 천도교 활동에 전념했다는 점이지만, 독립운동을 완전히 놓지는 않은 것으로 보이는게, 광복 후 민족 지도자로 인정받고 임시정부 측에서 많은 활동을 한다.(김구, 이승만, 오세창 등과 함께 한민당 영수로 추대되었지만 사양했다든지, 임시정부환영준비위원회 위원장으로 임정 요인들을 맞이했다든지. 김구 주관 순국선열추념대회 부회장으로도 뽑힘.)
위키백과 참조.
http://premium.mk.co.kr/view.php?cc=100000&field&keyword&page=3&no=15381

이필주 목사 : 기독교 대표. 3.1운동 이전에는 상동청년회에 가입, 기독교청년회(YMCA) 등에서 독립 운동을 했다. 3.1 운동 당시에는 2년 간 옥고를 치른다. 출옥 후 미아리 청파동 용두동 신촌 등의 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하면서 부설 유치원, 소학교, 부녀자를 위한 야학 등을 개설하여 육영사업에 힘썼다. 이후 노령으로 서울을 떠나 수원 남양교회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등 일제에 항거하다가 1942년 병으로 사망하였다.
http://33in.co.kr/bbs/content.php?co_id=person33_3

백용성 스님 : 불교 대표. 3.1운동으로 1년 6개월 간 복역 후 일본의 대처승 정책에 반발하여 불교계 정화를 위해 노력. 불상, 불교 유물 등을 가장하여 상해로 꾸준히 독립운동 자금을 보내었다고 한다. 1930년 윤봉길 의사를 제자로 삼은 뒤, 그를 상해로 보내어 의거를 일으키게 했다. 1938년 중국으로 건너가 장제스, 마오쩌둥 등을 만나 대한의사군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하였고, 실제 준비하는 과정에서 일제 밀정에 의해 작전이 들통나 북간도에 마련되었던 독립군 거소가 완전 파괴되고 만다. 태평양 전쟁 소식을 듣고 피를 토한 뒤 열반.
위키백과 참고

유여대 목사 : 기독교 대표. 태화관 모임에 참석하지 못한 것 때문에 어떤 이는 이 분을 민족대표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한다. 앞뒤 사정을 모르면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다. 이 분이 태화관 모임에 못 온 이유는 같은 날 의주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한양에 올라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시위군중을 지휘하며 만세운동을 주도하던 중 현장에서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다.(따라서 민족대표를 비판하는 이들이 시위 현장에 오지도 않고 스스로 잡혀 들어갔다는 비판은 이 분께는 타당하지 않은 것이 되겠다.) 옥고를 치른 후 폐교에 이른 양실학교를 재건하여 후진 양성에 힘썼고, 병석에서도 민족 계몽을 위한 여러 권의 책을 저술하고 그 판매대금을 고아들을 위하여 쓰다가 1937년에 순국.
http://33in.co.kr/bbs/content.php?co_id=person33_14
http://www.mpva.go.kr/narasarang/month_hero_view.asp?id=165&ipp=12

최성모 목사 : 기독교 대표. 3.1운동 당시 황해도 지역 시위를 주도했다. 3.1운동으로 복역한 이후, 감리교 연회에서 그를 만주로 파견하여, 만주 펑톈에서 목회자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36년 사망.
http://33in.co.kr/bbs/content.php?co_id=person33_29

박동완 목사 : 기독교 대표. 3.1운동에 참여하여 복역한 뒤, 출소 후 신간회 간사를 맡았다. 1925년에는 흥업구락부 조직에 참여했다. 1927년 신간회 본부 상임간사를 맡았다. 1927년 중국 동삼성에 거주하는 한인이 중국 관헌으로부터 귀화를 강요받고 박해받자(만보산사건), 재만동포옹호동맹을 결성하고 중앙상무집행위원에 임명된다. 1928년 재만동포옹호동맹의 특파원으로 중국 봉천성과 길림성 일대를 돌며 만주 지역 동포들의 상황을 살폈다. 1928년 하와이에서 청빙을 받아 12년간 목사로 재직하였고, 목회 활동과 함께 한글, 한국 역사, 한국 문화를 전파하고 교포 2세들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사업에 집중했다. 이 시기 국내의 흥업구락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한 것으로 보는 자료가 많으나 확실한 증거는 없다. 1941년 사망. 3.1운동 이후 일본과 같은 시간을 쓰지 않기 위해 시계를 30분씩 늦춰놓고 사용했다고 한다.'
위키백과
http://www.mpva.go.kr/narasarang/month_hero_view.asp?id=344&ipp=12
http://kcm.kr/dic_view.php?nid=20084&key=8&kword=&page=

이명룡 장로 : 기독교 대표. 3.1운동 이전에도 동양척식주식회사와 날을 세우고,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3년 동안 복역하는 등 항일 활동을 하였다. 3.1운동으로 2년 형을 선고받고 출옥한 후에도 계속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강우규 의사의 총독 저격사건에 연루되어 일본 헌병에 검거되기도 하였다. 광복 후 조만식과 조선민주당을 조직하여 정계와 교육계에서 활약했다. 평생 농기구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한다.
http://www.hddy.or.kr/bbs/board.php?bo_table=sub04_03&wr_id=138&page=3
http://w3devlabs.net/korea/archives/tag/%EC%9D%B4%EB%AA%85%EB%A3%A1



총칼들고 싸우거나 일제의 압박에 무조건 치받고 일어서서 감옥에 수차례 들어가는 것만을 적극적인 항일 활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여기 기록에 있는 분들 중 일부에 대해 탐탁치 않아 할 지도 모르겠다. 그렇다해도, 여기 이 분들은 대부분 적극적으로 항일활동을 하신 분들이고, 아닌 분들도 나름의 방식으로 항일활동을 지속하신 분들이다. 일부 행적을 비판할 수는 있을 지 몰라도, 욕을 하거나 폄하하거나 거짓된 루머를 퍼뜨려도 될만한 분들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이상으로 민족대표 33인 중 최소한 23인이 적극적인 항일 활동을 하셨음을 증명해 보았다. 다음 편에서는 적극적 항일 활동보다는 주로 종교 활동에 전념한 것으로 보이는 6명의 민족대표(이중 2~3명은 나름의 항일 활동을 한 것으로 보이나 증거가 확실하지 않은 분들)와 논란의 대상인 인물 1명(이갑성이라는 분으로 표면적인 행보는 매우 적극적인 독립투사였으나 몇몇 독립운동가들에 의해 일제의 이중 첩자가 아니었는지 의심받고 있다.), 마지막으로 확실하게 변절한 세 사람에 대해 다루어 보겠다.

그 외 다음 편 예고
"과연 1920년대 대부분의 민족대표가 변절하였는가? - 설민석 강사의 주장에 대한 사료를 통한 답변"
"모두가 믿고 있다. 그들은 자수했노라고. 정말 그랬을까?"
"후손들이 친일파 후손이라 떵떵거리고 산다고? 배가 부르니까 저런 단체도 만들고 한다고? 진실은 무엇일까?"

Friday 17 March 2017

민족대표 33인과 친일파(1)

기왕 이렇게 된 거 할 일도 많고 먹고 살기도 바쁘지만 한 번 사료를 뒤적거려 보자. 어제 오늘 몇몇 언론들이 적극적으로 진실을 밝혀준 덕분에 기사 댓글의 분위기가 많이 바뀌긴 했다.

어제 댓글 분위기 :
1. 33인 중 만해 한용운 한 명 빼고 다 변절했다! 혹은 대다수가 변절했다.(이 사람들이 99%)
2. 33인 중 변절한 사람 3명 뿐이다.(1%)

오늘 댓글 분위기 :
1. 어제와 같은 주장 (40%)
2. 친일 안 했다고 해서 당당할 수는 없다. 적극적으로 친일을 안 한 것뿐이지 독립운동하신 분들과 똑같이 대하면 안 된다. (20%)
3. 이후 행적이 문제가 아니라 3.1운동 당시의 행적은 비판받아 마땅하다.(20%)
4. 33인 중 변절한 사람 3명 뿐, 우리 조상을 우리가 욕 보여서는 안 된다.(20%)


이 중 오늘 댓글 3번 주장은 다시 논할 필요가 있는 문제다. 일단 1번과 2번 주장에 대해 검증에 들어가보자. 그 분들은 4번처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머리가 없다" "주입당한 대로 믿는다"고 주장하면서, 자신들이 그렇게 행동하고 있다는 사실은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팩트 검증을 해 보자는 거다. 바빠 죽겠어도 우리를 위해 피까지 흘렸던 우리 조상들을 함부로 폄훼하는 행동에 너무 화가 나서 못 견디겠어서다.

일단 급한대로 그 누구도 깔 수 없는 영구까방권 획득하신 확실한 몇 사람만 먼저 얘기해 보자.

만해 한용운 : 1번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인정하는 분이니 굳이 얘기할 것은 없지만, 그래도 한 가지는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민족대표 33인이 3.1운동 당시 일제에 자수하여 잡혀들어간 것 자체가 변절인양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따지면 그들이 그렇게 칭송해 마지않는 만해 한용운도 변절자가 된다. 자수했으니까. 다시 이야기하지만 당일의 행적에 대해 비판의 소지가 있는 것도 사실이고, 그 부분은 따로 논해야 한다. 일단 만해는 변절하지 않은 것으로 하고 넘어가자.

김병조 목사 : 민족대표들이 자수한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진 사람들에게 빅엿을 먹이시는 행적을 보여주신 분. 사정 때문에 한양에 늦게 도착하여 태화관 모임에 참석하지 못했고, "자수도 하지 않았다!" 이 분은 상해로 망명하여 임정에 참여하고, 민족 정신을 고취하는 여러 사서를 저술하시며 끝까지 독립운동가로 살다가 돌아가셨다. 이 분을 변절자라고 주장하려면 김구 선생도 변절자라고 생각해야 한다.(그 정도로 확실하다는 뜻으로 한 말이지 김구 선생을 폄하하려는 건 절대로 아니다.)

남강 이승훈 : 기독교 대표 중에서도 수장으로 참여했다. 안창호의 강연에 감명을 받아 신민회에 들어갔고, 이후 교육자로서의 생을 산다. 안악사건에 연루되어 제주에 유배되었고, 105인 사건으로 5년 간 감옥살이 했으며,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선언을 하고 다시 감옥살이하여 33인 중 가장 늦게 출소했다. 그 후 조만식과 함께 물산장려운동에 전념하다가 1930년 작고. 총들고 싸우지는 않았는지 모르겠지만 국사교과서에 기록된 사건 5가지에 연루되신 분이다. 이 분을 까려면 안창호를 비롯하여 당시 자강론을 주장한 민족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모두를 우리 역사에서 파내야 한다.

오세창 선생 : 천도교 대표 중 한 분이었고, 일제의 숱한 회유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신의 지조를 지켰다. 간송 전형필의 스승이었으며 간송과 함께 우리 문화재를 되찾아오고 보존하는 일에 전력을 기울였다. 해방 후 반민특위의 현판에 "민족정기"라는 네 글자를 남긴 그야말로 독립운동가의 표본과 같은 인물.

양한묵 선생 : 천도교 대표 중 한 분이셨으며 3.1운동 후 감옥에 갇혔을 때 모진 고문을 당하고 고문 후유증으로 그대로 옥사. 민족대표를 까는 이들이 그렇게 원하는 "독립운동으로 목숨 버린 분" 중에 한 분이 이 분이다.

신홍식 목사 : 기독교 대표로 3.1운동에 참가. 옥고를 치르고 고향에 돌아가서도 계속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여러 차례 감옥에 투옥. 항일활동으로 가세가 기울어 이 분의 자녀는 광복 후 막노동판을 전전했다고 한다. (민족대표 까는 이들이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는 고생많이 한 민중이 바로 이 분 후손이다. 하긴, 그 후손도 깠지? 친일파 후손이라면서..)

신석구 목사 : 기독교 대표. 3.1 운동 후 1938년 신사참배 거부. 1945년 전승 기원 예배 거부로 옥중에서 해방을 맞았다. 감옥에 얼마를 가 있었던 건지..

이종일 선생 : 천도교 대표로 3.1운동에 참가했고 보성인쇄사 사장으로 선언서 인쇄를 담당했다. 3.1운동으로 2년 6개월 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하자마자 1922년 3월 1일에 천도교 교인을 중심으로 제2의 3.1운동 기념식을 거행하려다가 탄로나 다시 감옥에 간다. 그 후 또 다른 독립 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한국독립비사라는 역사책을 쓰다가 탄로나 압수당하였다. 이후 영양실조와 고문 후유증으로 1925년 순국. 2년 6개월 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당하고 풀려난 지 3년 만에 고문 후유증으로 돌아가신 분이 변절자인가? 말해보라, 설민석!

이종훈 선생 : 천도교 대표로 동학농민운동에도 참가했던 최고령자였다. 옥고를 치른 후 만주로 넘어가 독립운동을 하다가 역시 고문 후유증으로 1931년 순국.

박준승 선생 : 천도교 대표. 3.1운동 때 호남 지방 민중 봉기를 주도하고 감옥에 갇혀 1921년 옥사.

오화영 목사 : 기독교 대표. 단순히 독립선언서에 서명만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목회하던 개성과 원산에 만세운동 조직을 만든 것이 들통나 중형을 선고 받음. 이후 신간회 참여. 광주학생운동흥업구락부 사건에 연루되어 모두 3번이나 옥고를 치름.

양전백 목사 : 기독교 대표. 105인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3.1운동으로 다시 옥고를 치른다. 그의 주도로 선천 지역에서 만세 운동이 열렸다. 목회를 하며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33년 사망.


일단 급한 대로 행적에 논란의 여지가 없고 확실하게 항일 활동을 하셨으며 자료가 쉽게 입수되는 분들 12명을 먼저 적어 봅니다. 다음편에는 논란의 대상이라기보다는, 그렇게 보고 싶은 사람들이 논란 거리로 만들고 싶어하는 다른 분들을 다뤄보겠습니다

설민석 논란과 민족대표 33인

역사 강사 설민석 씨가 과거 강의에서 했던 민족대표 33인에 대한 발언이 문제가 되고 있다.

발언 내용은 "설민석 강의, '민족대표 33인' 폄훼"... 후손들 반발이라는 기사에 실려 있다. 기사에 소개된 발언 내용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 최초의 룸살롱이 있었습니다. 태화관이라고. 대낮에 그리로 간 거야. 그리고 거기서 낮술을 막 먹습니다.... (태화관) 마담 주옥경하고 손병희하고 사귀었어요. 나중에 결혼합니다. 그 마담이 DC(할인) 해준다고, 안주 하나 더 준다고 오라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확실히 표현에 문제가 좀 있기는 하다. 설민석 강사 본인도 표현 상의 문제를 인정하고 다음과 같이 사과를 하였다. "대중의 죽음 알리려 했을 뿐" 민족대표 33인 폄훼 논란에 설민석 사과


민족대표 33인이 3.1운동 당일에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자발적으로 일본 경무 총감부에게 연락해 투옥된 점과, 탑골공원에서 만세 운동이라는 역사의 중요한 현장에 있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그 자리에서 만세 운동을 이끈 것은 학생들과 일반 대중들이었다는 사실에 대해 다양한 학계의 평가가 있고 민족대표에 대한 비판적 견해 역시 존재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건에 대한 견해일 뿐 민족대표 33인을 폄훼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단지 목숨을 걸고 일본 제국주의와 싸운 수많은 학생들의 노력과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이름 모를 대중들의 숭고한 죽음을 널리 알리고 싶었을 뿐 ... 의도와 달리 유족들에게 상처가 될 만한 지나친 표현이 있었다는 꾸지람은 달게 받겠다. 저 때문에 상처 받은 분들께 깊은 사과드린다.


사실 표현 상의 문제가 좀 있을 뿐, 설민석 강사의 주장이나 사과 그 자체에 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민족대표 33인의 삼일절 당일 처신에 대해서는 역사학계 내에 다양한 시각이 공존하고 있고 비판의 여지가 있다. 긍정적으로 보는 측에서는 민족대표들이 간디의 영향을 받아 비폭력저항운동을 꿈꾸고 있었고, 자신들이 만세운동 선두에 서는 것을 통해 일제의 폭력 진압이 더 심화될 수 있음을 우려했다고 본다. 부정적으로 보는 측에서는 스스로 자수하여 잡혀 간 것이 당시 대표들의 어떤 한계였고, 실제 만세운동은 대중들에 의해 진행된 부분이 더 크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민석 강사의 사과에 부족한 부분이 보인다. 민족대표 33인의 이후 활동에 대해 상세히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결과는 네티즌들의 오해로 나타났다. 댓글을 쓴 네티즌들의 90% 이상은 민족대표 33인 중 만해 한용운을 제외한 32인이(또는 최소한 절반 이상이) 일제에 부역한 변절자라고 주장했고, 그러한 주장들이 많은 찬성을 얻어 댓글 상위권에 랭크되었다. 실제로는 민족대표 33인 중 변절한 사람은 3인 뿐이며, 보조 요원이었던 15명을 더해 민족대표 48인으로 범위를 넓히더라도 변절자는 5인에 불과하다. 참고 : 3·1운동 이끈 민족대표 대부분 변절했다고? (그 외 위키백과, 나무위키 등의 민족대표 33인 항목을 찾아보면 민족대표들의 행적들이 상세히 나와 있다. 그 외 친일이 의심되었던 이갑성의 경우도 현재는 여러 검증에 의해 친일파가 아님이 확인되었고 처음 문제를 제기했던 민족문제연구소도 친일파 의혹을 철회한 상황.)


필자를 포함한 소수의 인원이 열심히 그들의 오해를 풀어주고자 했으나, 다음 포탈의 글 작성 수 제한으로 인해 더 이상의 활동이 불가능한 상황이며, 몇 시간이 지나자 다시 처음처럼 32인의 변절자 주장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는 형국이다. 만약 자신의 글로 인해 촉발된 이 어이없는 상황을 설민석 강사가 알고 있었다면, 그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해명했어야 한다. 물론 사과문에서 설민석 강사가 민족대표 33인의 이후 행적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음을 에둘러 언급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날 그 사건에 대한 견해일 뿐이지, 민족대표 33인을 폄훼하려는 의도는 없습니다. 또한 그 날의 사건만으로 민족대표의 다른 업적들이 희석되거나 가려져서도 안 되며, 그분들을 추모하여 의미 있는 활동을 하고 계신 유족 여러분들께 상처가 되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출처 : 설민석 페이스북


결국 문제는 설민석 강사의 의도와는 달리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민족대표의 다른 업적들이 희석되거나 가려지는 수준이 아니라 친일파 매국노 일제 앞잡이 수준으로 비하 당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게다가 역사에 대하여 생각할 때 역사적 사실을 중시해야 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네티즌들은 필자 및 일부의 네티즌들이 제시하는 근거를 무시하거나 폄하하면서 그들만의 주장을 계속 펼쳐 나가는 몰지각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래서 그가 이 글을 볼 가능성이 매우 적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 다시 설민석 강사에게 촉구하지 않을 수가 없다. 오도된 진실을 바로 잡아 달라. 일생을 고난 속에서 살아간 독립운동가들과 그 후손들이 매국노와 매국노의 자손으로 오도되는 이 서글픈 현실에 대해 다시 입을 열어 달라. 당신의 잘못이 아닐 지라도, 당신이 해결해야만 한다.

민족대표 33인과 친일파 논란에 대한 팩트 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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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대표 33인의 후손들에 대한 논란팩트 체크
1편 / 2편


덧 : 설민석 강사의 사과문으로 보아 그가 33인의 이후 행적을 긍정하고 있다고 여겼으나, 사실은 강의에서 "민족대표 대부분은 1920년대에 변절했다."라는 주장을 펼친 것이 확인되었다. 위에도 언급했듯이 이 주장은 전적으로 거짓이다. 결국 이 주장으로 인해 소송까지 당하게 되었는데, 설민석 강사가 결자 해지의 정신으로 진정하고 진실된 사과를 하고, 후손들은 소송을 취하하는 것으로 좋게 마무리 되었으면 한다.